지인의 소개로 5월의 마지막날 베트남에서 국제전화가 왔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회사에서 외근 도중 쓰러져서  뇌경색판정을 받았는데 업무상 질병으로 산재가 가능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문의였다.  여러 산재관련 전문가들과 상담했으나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을 듣고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의뢰인이 연락했다고 한다.

행정사님...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아들로서 나중에 후회로 남을 것 같아 실낱같은 가능성만 있다고 보인다면 수임을 부탁한다는 취지였다.

​사실관계를 약 40분간 듣고 나서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 사건을 과연 처리할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산재건 이었다. 몇가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주고 전화를 끊었다. ​한국과 달리 베트남은 우리와 문화나 업무여건등이 다르고 조직 시스템등이 대부분 부재하여 과로, 스트레스를 입증하기란 맨 땅에 헤딩해야 하는 처지였다.

먼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파악, 부당해고인지, 해외산재 가입유무등 기초적인 체크를 마치고 관련 법, 시행령, 노동부 고시, 업무상재해 결정사례, 대법원판례등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래 맞아!!! “과로, 스트레스만 내가 명확하게 입증해주면 승산이 있을거야” 라는 실낱같은 빛줄기가 내 뇌리를 스쳤다.  그래 한번 해보자...

​다음날 베트남 아드님과 국제전화를 통해 쉬운 사건은 아니지만 제가 한번 맡아보겠다고 하고 덜컥 수임을 맡았다. 나에게 위임을 맡긴 이상 어려워 힘들겠다는 핑계는 이 시간 이후로 내 뇌에서 지우기로 다짐했다.

그 이후 나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었다. 과로에 대한 입증자료, 스트레스에 대한 입증자료. 無에서 有를 만드는 자료를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고,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산재위원회에서 과연 받아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준비과정 내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 베트남의 현지상황을 역이용하자. 근로복지공단도 산재위원회 위원도 조금만 조사해보면우리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논리만 잘 세우면 논거를 부정하지는 못할거야라고 나에게 주문을 걸고 나는 바로 대법원이 판단하는 기준을 중심으로 자료를 모으고 만들고 논리를 구성했다.

베트남 국제전화 5시간, 줌 화상미팅 수차례, 시골 어머님과의 수십차례 통화를 거치면서 나는 우리에게 유리한 새로운 여러 가지 정보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업장 동료의 진술서, 사업장 대표와의 전화, 확인서등...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확보하고 만들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치의 소견서가 문제였다. 선후배 의사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역시 어려운 사건이구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의사 소견서는 중요하나 절대적인 판단기준은 아니고 평균인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밝힌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다짐하며...

​주치의 방문 2회 주치의분께 객관적인 의학적 소견만 부탁했고, 단지 법적인 판단기준만 부연 설명을 드렸다.

이제 모든 자료는 다 확보했다. “경위서 4장”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리라.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불사르기 위해서 일요일 새벽 일찍 목욕탕에 갔다.

그리고 오전에 조용한 사무실로 출근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자판을 두드리기를 5시간...

​“窮則通”  간절히 원하면 통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내가 아닌 그분이 오셔서 대신 자판을 두드리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글이 매끄럽게 써지는 것이 아닌가??? 5시간 후 프린트를 하여 천천히 읽어보았다.

너무 만족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고 더 이상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다음날. 신청서와 경위서, 첨부서류 약100여장을 들고 근로복지공단에 대행인으로 접수시켰다.

​2달후 위원회 심리일정이 통보되었다. 그러나, 재조사를 이유로 위원회는 사건을 근로복지공단에 송부했다. 이후 또 한차례 일정이 잡혔으나 다시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제 마지막 위원회 심리일정이 10월5일 2시로 잡혔다. 약간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판정

신청인이 요양급여 신청한 상병 ‘뇌경색’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제1항2호의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된다.

업무상질병판정서를 읽은 순간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간 마음고생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가 한 개인, 한 가족에게 미천하지만 조그마한 도움을 드렸구나. “행정사로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라는 나의 좌우명을 하나 실천했구나 하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한가지 더 기쁜 소식은 내가 주장한 모든 논거들이 모두 인정되고 위원회 만장일치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다.

의뢰인 가족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간절히 그리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병욱 기자  gumpyi@kote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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